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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시간 가성비를 추구하는 '분초사회'

유튜브나 OTT 영상을 보면서 스마트폰으로 쇼핑을 하거나, 16부작 드라마를 정주행하기 전에 먼저 요약 영상을 찾아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버스 도착 시간이나 환승 통로를 따져 가장 빠르고 가까운 위치에 먼저 가 있던 적은 있으신가요? 요즘 사람들의 시간관념은 예전과 확연하게 달라졌는데요. '시간의 가성비'를 극도로 중요하게 여기면서 사용 시간의 밀도가 매우 높아졌답니다. 1분 1초가 귀해진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시간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 분초를 아끼려 고군분투하는 우리 모습

시간 단위를 분 단위로 쪼개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뿐 아니라 글로벌한 현상입니다. 『도둑맞은 집중력』의 저자 요한 하리(Johann Hari)에 따르면, 미국인은 1950년대보다 훨씬 더 빠르게 말하고, 덜 자고, 심지어 도시인은 20년 전보다 10% 더 빠르게 걷게 됐다고 해요. 가속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시간이 희소자원이 되면서 시간 효율성을 극도로 높이려는 트렌드를, ‘모두가 분초를 다투며 살게 됐다’는 의미에서 '분초사회'라고 불러요.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생활습관을 가진 ‘J형(판단형)’이 아니더라도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을 때가 많은데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 일상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1. '가성비'보다 중요해진 '시성비'

소비자라면 누구나 최저가 상품을 검색하죠. 하지만 발품을 팔아 절약해 얻는 효용 보다 그 시간을 절약해 새로운 경험을 하는 효용이 더 크다면, 최저가 검색을 포기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요즘엔 발품을 포기하고 확보한 자투리 시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니까요. 가격 대비 성능의 효율을 의미하는 '가성비’ 만큼이나 시간 대비 성능의 효율, 즉 ‘시성비'가 중요해지는 이유랍니다.

 

예전에는 집값이 저렴한 교외에 내 집을 마련하고 1시간 이상의 출근도 감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어요. 이제는 내 집이 아니더라도 거주지와 직장의 거리를 줄여 출퇴근 시간을 아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답니다. 젊은 세대 직장인은 ‘직주 근접'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서 직장을 구할 때 보수, 평판, 성장 가능성과 더불어 '회사의 위치'를 따지는 구직자가 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요.

 

코로나19 진정 이후에도 여전히 이슈로 남아있는 재택근무와 유연근무제의 시행 문제도 변화된 시간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팬데믹 때 도입했던 재택근무는 많은 직장인에게 출퇴근 시간과 직장에서 무의미한 회의와 회식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어요. 단순한 시간 절약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일상의 흐름을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죠.

 

2. 모듈화 해 저글링 하는 시간 단위

분초사회의 직장인은 업무 시간을 조각내 철저하게 모듈화해요. 시간 단위를 조밀하게 나누어 관리하는 것이죠. 최근에는 반차를 넘어 '반반차', '반반반차'를 도입하거나 도입하려는 기업들이 늘고 있답니다. 보통 하루나 반나절을 쓰는 연차를 아예 시간 단위로 쪼개 쓸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또 ‘짬PT', ‘틈새PT', '세미PT' 등 점심시간에 30분에서 50분가량 운동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활용하기도 해요. 시간을 촘촘한 모듈로 구성하여 효율을 높이는 것이죠.

 

분초사회의 도래가 단순히 시간의 양적 흐름만 단축시킨 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질도 중요해지며, 시간 사용의 밀도를 높이고자 해요. 시간 단위를 쪼개면, 숨겨져 있던 사각지대를 확보하게 되는데요. 큰 시간과 작은 시간이 동시에 활용해 자연스럽게 여러 일을 한꺼번에 수행하는 '시간의 저글링'으로 이어집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듣는 책, 오디오북입니다. 오디오북은 대체로 운전이나 가사일 등 다른 일을 하면서도 들을 수 있는 매체라서 멀티태스킹이 얼마나 늘어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간접 지표가 되고 있어요.

 

3. ‘스포 포함’ 결론부터 미리 보기

시간 개념이 달라지면서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일단 결론을 빨리 알고 싶어하죠. 지금까지 스포일러는 콘텐츠 소비에서 하나의 금기로 여겨졌어요. 그런데 요즘 유튜브에서는 '스포 포함' 혹은 '결말 포함'을 명시한 요약본 영상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시간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원이라고 할 때, 가장 아까운 시간은 ‘실패한 시간'일 것입니다. 16부작 드라마를 끝까지 봤는데 결말이 재미없게 끝난다면 그보다 허무한 일은 없겠죠? 그래서 일단 유튜브에서 결말까지 확인한 후, 본격적인 드라마 시청을 ‘각 잡고' 시작한답니다.

 

또 더 빨리 시청하고 싶어 하는 이용자의 욕구를 반영해, 넷플릭스는 2019년 재생속도를 선택하는 기능을 추가했어요. 0.5배, 0.75배, 1배(표준), 1.25배, 1.5배의 속도 중 선택할 수 있고, ‘10초 앞으로’, ‘10초 뒤로'도 돌릴 수 있답니다. 이제 우리는 재생속도를 조절하며 영화를 보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4. 실패 없는 쇼핑

쇼핑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 쇼핑에는 돈뿐 만 아니라 시간도 많이 들어요. 실패한 쇼핑은 돈과 시간이 함께 낭비되니 아깝기 그지없죠. 그러다 보니 실패를 줄이기 위한 여러 시도가 속출하고 있어요.

 

 ▶ 착용샷보다 다른 구매자의 실제 리뷰 사진을 참고할 것
  제품 상세 사진으로 소재, 원단, 마감 처리를 직접 확인할 것.
  구매 후기를 검색할 때 '낮은 평점'순으로 보며 '알바 리뷰'를 걸러낼 것.
  지나치게 저렴한 제품은 구매하지 말 것.
  같은 제품의 사이즈와 컬러를 한꺼번에 주문해서 맞는 것만 남길 것.

 

선물에 대한 생각도 바뀌고 있어요. 요즘엔 매우 직설적이라서 받고 싶은 선물 리스트를 업로드해 놓고 친구들에게 알리는 카카오톡 ‘위시리스트'를 활용해요. "뜯어봐야 아는 상품"은 환영받지 못한답니다. 이전 세대가 체험해 보지 않은 것에 가치를 두었다면 요즘 Z세대는 알 수 없는 앞날이나 예상 못 한 일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해요. 가급적 힘을 덜 들이고 실패는 피하고 싶은 것이죠.

 

# 시간이 소중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는 매우 오래된 격언입니다. 항상 시간은 중요했어요. 2024년 새해를 맞은 이 시점에서 시간이 과거 어느 때보다 소중한 지원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더 바빠져서가 아니랍니다.

 

첫째, 소유 경제에서 경험 경제로 경제 패러다임이 이행하면서 시간이 돈만큼이나 중요한 자원이 됐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여행지, 맛집, 핫플레이스의 인증샷으로 자랑을 하는 시대인데요. 모두 시간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랍니다.

 

둘째, 분초 단위로 돌아가는 IT 기술에도 원인이 있어요. 카카오맵에서는 지도상에 실시간 버스 위치를 나타내는데, 버스 위치를 초 단위로 갱신하며 신호 대기 상태나 도로 상황에 따른 이동 속도도 확인할 수 있어요. 이러한 환경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24시간을 주도적으로 분초 단위로 활용하려는 것은 당연하겠죠?

 

셋째, 시간을 들여 '봐줘야' 하는 볼거리가 많아졌다는 점을 들 수 있어요. 최근 넷플릭스, 밀리의 서재, 윌라 등 폭발적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구독형 콘텐츠 서비스와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SNS는 사람들의 시간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요. 봐도 봐도 끝이 없는 콘텐츠의 바다에서 사람들은 정속의 삶을 포기하고 2배속, 3배속의 삶을 살게 된 것이죠.

 

넷째, 코로나19 팬데믹이 시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들어 놓았어요. 재택근무, 유연근무 등이 시행되며 시간 사용이 개인마다 매우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혼잡 시간을 피해 출근하고, 집중할 시간대를 선택해 근무할 수 있게 됐어요. 이 과정에서 개인마다 시간 활용 방법이 다각화됐고, 획일적인 시간의 의미는 옅어졌습니다. 평범한 일상 시간의 밀도를 높여, 효율적으로 응축해 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 것이랍니다.

 

# 기업의 소비자 시간 쟁탈전

이러한 분초사회 소비자들의 변화하는 시간 개념에 산업계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요?

 

분초사회에서 소비자의 시간이 핵심자원이 되면서, 이제 유통의 핵심 경쟁력은 소비자를 얼마나 오래 머무르게 하는지, 어떻게 점유 시간을 늘리는지에 달려있어요.

 

인스타그램은 수백만 명의 사용자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앱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고안하고, 쇼핑 앱은 다운로드를 유도하기 위해 소비자에게 여러 혜택을 줍니다. 간단하지만 중독성 있는 게임이나 즉각 리워드를 제공하는 혜택성 이벤트 또는 커뮤니티 활동을 적극 활용해 소비자글 붙잡아 두는데요. 병원 예약 앱인 '굿닥', 금융 앱 '토스', 헬스케어 플랫폼 '캐시워크' 등이 대표적입니다.

 

시간 관념이 이처럼 변화하면서 기업에게는 소비자의 시간을 아껴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과제가 됐어요. 예컨대 '원격 줄 서기 서비스'는 이용자가 식당 앞에 줄을 서지 않고 사전에 예약한 시간에 맞춰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팬데믹 시기에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확대됐던 이 서비스는 팬데믹 종식 이후에도 자신 시간을 아끼려는 소비자의 호평을 받으면서 ‘캐치테이블'이나 '테이블링' 음식점 예약 앱 설치 수도 크게 늘었어요.

 

# 그럼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2015년에 발표한 병원의 응급 상황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응급실에서 지속적인 방해가 일어나면 239건의 처방 중 208개의 오류가 발생한다고 집계됐어요. 의사들이 방해를 받아 일이 중단되면 오류 발생률은 282% 증가했고, 일하는 도중에 멀티태스킹을 수행하면 186% 증가했어요.

 

끊임없는 전환이 우리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결국 멀티플레이는 생산성을 저해한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어요. 전환 비용 효과가 뇌에서도 작용하는 것이죠. 뇌는 한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이동하면서 재설정되어야 하는데요. 방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려야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려야 해요.

 

잠시 SNS를 확인한다는 것이 1시간이 지나도록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고 계속 보고 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것이 바로 시간 저글링의 대가랍니다. 바쁘게 살면 생산성이 높고 삶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유의할 점도 적지 않은데요. 노출되는 정보량의 엄청난 팽창성과 정보가 들이닥치는 속도를 아무 대가 없이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시 멈춰 서서, 분주하게 사는 동안 AI 시대에 반드시 필요해진 사색을 위한 여백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에게는 여백이 필요하답니다. 2024년에는 지나친 속도와 전환, 강한 자극에서 벗어나 생각이 배회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보세요.



자료: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