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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최고의 자아'를 선망하는 육각형 신드롬

요즘 소개팅 당사자를 상대에게 소개할 때 "OOO 씨는 외모, 패션 센스, 운동 신경, 인성…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육각형 남자예요" 식의 표현을 자주 들을 수 있어요. ‘육각형 개발자’라는 말도 있는데요. 코드 개발과 기본 IT 기술은 물론이고 팀을 이끄는 리더십과 소통을 위한 글쓰기 역량 등을 두루 갖춘 진정한 개발자를 가리켜요. 완벽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육각형'이라는 말이 여러 상황에서 쓰이는 추세입니다. 확산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육각형 신드롬’을 관찰해 봤어요.

 

#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육각형인간'

#육각형연예인, #육각형아이돌, #육각형여자, #육각형남자, *육각형브랜드, #육각형운동선수, *육각형미드필더····. 최근 SNS 인기 검색어 중에는 '#육각형OO'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해요. 왜 육각형일까요? 어떤 대상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성을 비교 분석할 때, 그 기준을 축으로 하는 육각형 이미지를 그리곤 하는데요. 이를 '헥사곤 그래프'라고 해요. 여기서 모든 기준 축이 끝까지 꽉 차 완벽한 모습을 보이면 정육각형이 되기 때문에, 육각형은 종종 '완벽'이라는 의미로 쓰이죠.

 

요즘 사람들, 특히 20~30대 젊은이들은 이 육각형의 완벽을 추구해요. 부자라도 단지 돈만 많으면 안 되고, 생계가 아닌 자기 발전에 기여하는 일을 하면서 부를 창출해야 남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어요. 가수라면 가창력만 좋아서는 안 되고 인성도 좋고, 부유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잘 성장한 티가 나야 한답니다.

 

이처럼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집안, 성격, 특기 등 모든 것에서 하나도 빠짐이 없는 사람을 '육각형인간'이라고 불러요. 모든 측면에서 완벽하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의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육각형 신드롬’도 일어나고 있는데요. 육각형인간 트렌드는 구체적으로 몇 가지 흥미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 아무나 될 수 없는 육각형인간

육각형인간에게는 달성하기 힘든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요. 한두 영역의 성취만으로는 육각형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담 쌓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어요.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요소보다 운명처럼 타고나야 하는 요소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죠.

 

● 노력으로 가질 수 없는 ‘타고난’ 집안

'집안'은 육각형인간이 되기 위한 대표적인 필수조건이에요. 과거 어른들은 어려운 집안 환경을 딛고 일어서 성공한 '자수성가형 부자'를 높이 평가했죠. 반면, 요즘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금수저형 부자'를 선망해요.

 

유명인 팬덤도 그렇답니다. 기성세대는 고난과 감내의 시간을 버티고 마침내 성공의 길에 접어든 고진감래형 서사를 가진 인물에 열광해요. 생활고에 시달리던 임영웅 씨가 가수 선발 오디션에서 우승해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트로피를 건네는 영상은 큰 화제가 되었는데요. 가난을 함께 경험한 중년 이후의 세대에게 인기 연예인의 고생담은 그의 후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의 반응은 반대예요. "OO은 역시 좋은 집안 출신으로 곱게 자라서 그런지 성격도 좋다"는 식으로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를 칭찬해요. 강남 8학군 출신, '가정교육 잘 받은', '아빠가 교수' 같은 조건이 요즘 아이돌 앞에 붙는 수식어가 되고, 풍요로운 집안에서 구김 없이 자란 모습이 이들의 셀링 포인트가 되고 있어요.

 

● 외모에 관심 커진 남성들, 키 차이가 연봉도 좌우

외모를 중요시하는 풍조도 이어지고 있어요. 2000년대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는 외모가 스펙이 되어 개인 간의 우열 뿐 아니라 인생의 성패까지 좌우한다고 믿으며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을 가리켜 '루키즘(Lookism)’으로 부르기도 했죠.

 

최근 루키즘은 정도가 심해질 뿐만 아니라 특히 외모에 관심이 커진 남성들이 늘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외모 고민을 토로하는 남성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어요. 패션과 뷰티 시장에서도 남성들이 큰손으로 부상했답니다.

 

'무신사'와 '크림' 같은 패션 앱을 이용하는 남성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특히 20대 남성 비중과 증가 속도가 다른 연령대 보다 월등히 높아요. 화장품 시장에서도 남성 소비자가 증가하고 있어요. 남성이 구매한 상품도 스킨케어, 면도 관련 상품처럼 필수재에서 관리용 스킨케어 상품, 톤업 선크림, 컬러 립밤, 헤어 트리트먼트 등으로 다양해지는 추세죠.

 

외모 중에서도 타고난 영향을 특히 많이 받는 속성은 바로 '키'예요. 키 1센티미터의 가치를 연봉 'O천만 원'의 가치로 환산하는 조사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올 정도랍니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의 연구에 따르면 10~13 센티미터의 신장 차이마다 연봉이 최대 15% 차이 난다는 발표도 있었어요.

 

키를 육각형의 중요 속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어릴 때부터 키를 관리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어요. 저신장으로 병원을 찾은 어린이가 최근 5년간 50% 급증했는데요. 해마다 줄어드는 출생률을 감안하면 매우 많은 수치랍니다. 대부분 건강상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도 자녀의 키를 염려하는 부모들이 성장판이 닫히기 전에 성장호르몬 주사제를 처방 받으려는 것으로 보여요.

 

● 타고난 성격·지위 갖춘 주인공 선호

때로는 내가 직접 육각형인간이 되기 어렵다면, '외모' 같은 타고난 속성을 대신 달성해주는 연예인이나 브랜드를 추종하며 대리 만족하는 경향도 관찰된답니다.

 

아이돌 팬들 역시 내가 사랑하는 아이돌은 능력만 출중한 것이 아니라 착한 성격에 공부도 잘해야 하고, 학폭 문제도 없는 데다 작사와 작곡은 기본이고, 2~3개 정도의 외국어를 구사하며 좋은 집안까지 모두 갖춘, 이른바 '완성형 아이돌'이길 바라요.

 

타고난 지위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은 콘텐츠 시장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요. 과거 인기 많던 웹툰과 만화는 이야기 초반에 약한 주인공이 등장해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서사가 대부분이었어요.

 

반면, 요즘 웹툰 플랫폼의 인기 랭킹 상위에 자리잡은 [나 혼자 만렙 뉴 비] 같은 작품은 '고생의 과정'이 축약되거나 아예 부재해요. 초반에 주인공이 트럭에 치인 후 초능력자로 환생하거나, 현실을 비관해 자살을 시도한 주인공이 다른 시대로 타임슬립해 왕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노력 없이 무언가를 이루는 환상적인 줄거리가 인기를 얻고 있어요. 콘텐츠에서조차 사람들은 노력형 캐릭터가 아닌, 애초부터 최강자로 타고난 주인공에 열광하는 것이랍니다.

 

육각형인간을 선망하는 사람들은 대상이 육각형에 얼마나 가까운지 그 가치를 '숫자'로 계량화하고 서로 비교해 서열을 매깁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평범한 일반인이 출연해 자신의 매력을 내세우며 짝을 찾아가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어요. 하트시그널, 나는 솔로, 환승연애, 러브캐처, 솔로지옥, 돌싱글즈, 체인지 데이즈 같은 연애 예능 프로그램의 특징은 방송 출연자 뿐만 아니라 방송 시청자까지도 그때그때 출연한 인물을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댓글이나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출연자의 직업과 출신 학교, 외모, 성격 등 마치 평가표처럼 항목마다 점수를 채우고 이를 종합해 순위까지 매기죠. 모든 면이 완벽한 육각형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가치를 ‘수치화’ 해 증거를 댈 수 있어야 해요.

 

프랑스 한국
1. 1개 이상 자유롭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것 1.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2. 직접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하나가 있을 것 2.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3. 다룰 줄 아는 악기 한 가지가 있을 것 3. 2,000CC급 중형차 이상 소유
4.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 하나가 있을 것 5. 해외여행 1년에 1회 이상 다니는 정도
5. 공분에 의연히 참여할 것  
6. 약자를 도우며 봉사를 꾸준히 할 것  

(출처: 임의진, 『숫자 사회』, 웨일북, 2023)

 

한국에서는 점수와 순위가 주요 평가요소로 작용해요. 프랑스와 한국에서 중산층을 정의하는 기준을 비교한 표를 보면 한눈에도 한국의 기준이 '수치'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반면 조르주 퐁피두 전 프랑스 대통령이 제시한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에는 숫자가 보이지 않죠. 대신 삶에 대한 태도와 교양이 중요하게 인식됩니다.

 

이렇게 순위에 민감하다 보니, 남보다 뛰어난 육각형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비교해 일렬로 줄 세우는 '랭킹화’가 필요해요. 예를 들어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자랑할 때는 우리 마을의 생활 여건을 내세우기 보다 평당 가격이 얼마인지로 등급을 매겨요. 집 뿐만이 아니죠. 소득에 따라 탈 수 있는 자동차 등급도 은연 중에 정해져 있어요. 지갑, 벨트, 핸드백 브랜드에 대해서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브랜드 등급도'를 쉽게 검색할 수 있어요.

 

출처 : YG엔터테인먼트

육각형인간을 일렬로 줄 세우려는 욕망은 좋아하는 최애 아이돌에게도 적용되요 최근 여러 럭셔리 브랜드에서 앞다퉈 한국 아이돌 멤버를 브랜드 앰배서더로 선정하면서, 팬들 사이에서는 때아닌 계급 논쟁까지 벌어졌죠. 과거에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지가 아이돌의 경쟁력을 판별하는 기준이었다면, 요즘에는 어떤 유명 브랜드의 앰배서더가 되었느냐가 인기를 측정하는 잣대가 됐습니다.

 

# ‘나다운 행복’ 찾기 중요

모두가 완벽한 육각형인간이 되는 것을 꿈꾸지만, 실제로 이를 이루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요. 그렇다고 쉽게 단념할 수도 없죠.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요즘 사람들은 불편한 현실을 게임처럼 희화화해 가볍게 웃어넘기며 절망을 긍정 에너지로 만들고 있어요.

 

육각형게임 가운데 가장 쉬운 놀이는 의도적으로 현실을 과장하는 거랍니다. 요즘 '핵인싸' 사이에서 한 가지 사진 찍는 법이 유행하고 있어요. 주인공이 자세를 잡으면 주변 사람들이 각자 스마트폰으로 주인공을 촬영하는 척하고, 그 전체 모습을 하나의 사진에 담습니다. 마치 유명인이 레드 카펫에 등장했을 때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는 것과 유사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죠.

 

출처 : 이민정 인스타그램

육각형인간은 양면적이고 논쟁적인 트렌드라고 할 수 있어요. 완벽한 자아를 추구하는 열정을 붙어 넣는다는 긍정적 시각도 있지만,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완벽의 추구에 절망할 수 있다는 부정적 시각도 공존한답니다. 어쩌면 "나 오늘부터 ‘갓생’ 살 거야" 식의 놀이에 불과할 수 있고, 현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계층 고착화라는 사회적 문제를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어요.

 

현재 대한민국 20~30대는 단군 이래 가장 높은 소득과 교육 수준을 갖춘 ‘행운의 세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제성장 속도의 둔화로 눈높이에 맞는 기회가 줄고 ‘계층 이동 사다리’ 마저 무너진 가운데, 각종 소셜미디어를 통해 '만인이 만인과 비교되는' 시대를 살고 있기도 해요. 언제 어디서 나를 지켜볼지 모르는 익명의 타자들과 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젊은이들의 삶의 무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현실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육각형의 자아를 추구하는, 적어도 육각형으로 보이고자 노력하는 육각형인간 트렌드는 그 압박을 견뎌야 하는 일부 젊은이들의 활력이자 절망이면서 하나의 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육각형인간을 부러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육각형인간이 되면 행복할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심리학자들은 사람이 가장 행복한 때는 ‘가장 나다울 때’라고 지적해요. 비록 완벽한 육각형이 아닌 모난 모양이더라도 ‘나다운 행복’을 찾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다양한 모양의 구성원들로 우리 사회가 활력 넘치고 건강한 모습을 이뤄지질 바랍니다.

 

자료: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