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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같은 어른 ‘키덜트’, 네버랜드 신드롬 확산

'젊은 사고방식'은 단지 MZ 세대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앞선 X세대, 베이비부머 세대, 산업화 세대 모두의 관심거리죠. ‘젊음’이 우리 시대 최고의 미덕이자 지향점이 되고 있어요. 동화 『피터팬』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팬과 친구들이 사는 '네버랜드'처럼, 지금 대한민국은 모두가 젊은이로 남고자 하는 '네버랜드 신드롬'에 빠져 있지요. 따라서 우리 사회의 유년화는 일부의 취향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되고 있습니다.

 

# 네버랜드에 살고픈 ‘어른이’들

▲ 가수 임영웅 팬클럽 '영웅시대'(출처: 블로그 '디오 푸딩')

 

"노년의 비극은 아직 젊다는 데 있다." -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주변에서 핸드폰에 '아이언맨'이 그려진 빨간 케이스를 끼워 들고 다니는 중년 남성, '헬로키티' 액세서리를 차고 다니는 중년 여성, 가수 임영웅의 영상에 ‘주접' 댓글을 다는 것을 하루의 낙으로 여기는 시니어 영웅시대(임영웅 팬클럽)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스크를 쓴 채 인사하는 일이 많은 요즘, 차림새만으로는 모녀인지 자매인지, 조손녀 관계인지 알아보기 힘든 경우도 종종 일어나죠. 최근 '어른'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던 전형에 맞지 않는 스스로를 ‘어른이(어른+어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아동 취향의 물건을 모으며 즐거워하는 소비자를 '키덜트(Kidult, Kid+Adult)'라고 부르는데요. 조용히 혼자 취미를 즐기는 소수 마니아 집단으로 여겨지던 키덜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대단하다"라는 감탄으로 변하고, "멋져 보인다" 보다 "어려 보인다"가 더 큰 칭찬으로 변하고 있답니다. 나이보다 젊게, 어리게 사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 되고 있지요.

 

이제 어른이들은 "어른이란 이래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귀여운 것에 애정을 드러내고 당당한 유치함을 통해 일상의 재미를 모색하고 있어요.

 

영국 작가 제임스 매튜 배리의 작품 『피터팬』의 주인공 피터팬은 나이를 먹지 않는 마법에 걸려 영원히 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가요. 이에 빗대 정신분석학에서는 몸은 어른인데도 심리적으로 아이 상태에 머물려는 심리 상태를 '피터팬 신드롬'이라고 부릅니다.

 

피터팬처럼 늙지 않는 아이들이 모여 사는 나라, '네버랜드(Neverland)'의 이름을 따서 나이 들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이 많아지는 트렌드를 '네버랜드 신드롬'이라고 지칭해요. 피터팬 신드롬이 어른 세계에서 홀로 아이로 남아 퇴행하는 부적응 상태를 가리킨다면, 네버랜드 신드롬은 스스로를 나이보다 젊다고 여기고 '어른이'라고 불리는 것을 즐거워하는 현상을 나타내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랍니다.

 

오늘날 늙지 않고 아이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은 매우 보편화됐어요. 우리 사회의 청년화 혹은 유년화는 단지 일부의 취향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사고방식, 나아가 생활양식이 되고 있는데요. 젊음이 단지 찬미와 동경의 대상이 아닌 '추앙'의 단계에 이른 것이죠.

 

우리 사회에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네버랜드 신드롬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요? 첫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려는 ‘돌아감(return)’이고, 둘째는 지금 모습에서 더 나이 들지 않으려는 ‘머무름(stay)’이며, 셋째는 아이들처럼 재미있게 놀려는 ’놂(play)’이 있어요.

 

# “나, 돌아갈래”, Return 신드롬

어린 시절과의 ‘키치(kitch, 저렴하고 유치한 감성)’적인 만남은 먼저 ‘어린 취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22년 봄, 전국에서 품절 대란이 일어난 포켓몬빵은 잠재적 어른이가 얼마나 많은지 보여줬어요. 1990년대 어린이 사이에서 인기 높던 제품을 그때 감성을 담아 재출시한 포켓몬빵은 그 시절을 경험한 성인에게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청소년에게는 새로운 재미를 주며 10대부터 40대까지 폭넓은 인기를 누렸어요.

 

특히 ‘득템력’이 소비의 중요한 덕목이 된 요즘, ‘띠부띠부씰’을 뽑는 재미를 예전 그대로 살린 것이 어른이들의 동심을 자극했지요. 포켓몬빵은 출시 43일 만에 1,000만 개가 판매되며 1990년대의 인기를 뛰어넘었답니다.

 

또한 한소희, 태연 등 유명 연예인들이 착용하며 ‘프린세스 목걸이 세트’가 화제가 됐는데, 이 액세사리는 명품이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만든 다이소의 1,000~3,000원짜리 유아용 플라스틱 완구랍니다. 이 역시 SNS 인싸템으로 떠오르며 나이를 막론하고 ‘공주 세트’에 열광했고 이 제품은 품귀 현상까지 일어났죠.

 

▲ 포켓몬빵과 다이소의 '프린세스 목걸이 세트'

키덜트의 주류화는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최근 미국 여행 업계에서 떠오르는 트렌드는 ‘어른들을 위한 서머 캠프(Adult Summer Camp)’랍니다. 미국에서 서머 캠프는 주로 청소년이 여름방학에 참여하는 수련회 같은 것으로, 집을 떠나 타지에서 온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되곤 하지요. 이와 같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상징하는 서머 캠프를 그리워하는 어른들이 많아진 것이죠.

 

호텔급 숙소에 머물고 저녁에는 와인 파티를 여는 등 세부 구성은 어른 고객에게 맞춰져 있지만 서머 캠프만의 힐링 포인트도 놓치지 않는답니다. 캠파워먼트사가 주최하는 ‘치치(Chi Chi) 캠프’의 경우 참여자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독특한 룰이 있는데요. 캠프 시작 후 24시간 동안은 자신의 직업을 밝히지 않아요. 그리고 2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여자들 모두가 사회인의 모습을 내려놓고 인간과 인간으로 친구가 되는데요. 이곳에서는 이를 ‘마법 같은 경험’이라 말해요.

 

# “변화는 싫어”, Stay 신드롬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기 나이에 맞는 ‘나잇값’을 한다는 것을 의미했어요. 세월이 흐르며 외모에는 연륜이 쌓이고, 조직에서는 직급이 올라가며, 인간관계와 취향은 성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성숙이든, 성장이든, 연륜이든 “변하는 것은 싫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랍니다.

 

연공서열 문화가 지속된 한국 사회에서도 최근에는 승진을 당연히 따라야 할 수순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승진하면 권한 확대, 임금 인상, 사회적 인정이라는 보상이 주어지지만,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르고 고용 불안정도 감수해야 하죠. 승진해서 자신의 '워라밸'을 희생시키느니 차라리 평사원으로 지내기를 바라는 겁니다.

 

또한 실무자와 책임관리자를 상하 관계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다른 개별 직무로 생각하는 변화도 엿보입니다. 과거에는 관리자 직책을 맡는 것이 승진이라서 다시 사원으로 돌아오는 것은 좌천과 굴욕으로 여겼다면, 이제는 본인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면 직책을 기꺼이 반납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어요.

 

나이라는 통념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친구 관계와 여가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국의 수많은 '아우디(아줌마들 우정 디질 때까지)' 모임에서는 소녀 시절의 우정을 확인하듯 양말 색깔을 무지개색으로 깔 맞춰 신은 채 여행 사진을 찍고, 지역 맘 카페에서 만난 사람과 현실의 이웃'술’촌이 되어 우정 반지로 유대감을 표현하기도 해요.

 

예전에는 나이가 많다는 것은 곧 오랜 경험을 상징하고, 그 사람의 권위와 실력으로 간주됐어요. 하지만 30대에 대기업 임원에 발탁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더 이상 나이로 전문성이나 업무 능력을 판단할 수 없게 됐어요. 이제 젊은 외모는 자기 관리의 척도로 여겨진답니다. "나이를 알 수 없다"라는 감탄은 그만큼 자기 관리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며, “어리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쟁력이 되고 있어요.

 

# “재밌게 놀래”, Play 신드롬

팬데믹 이후 골프에 입문하는 '골린이'들이 많아졌는데요.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명랑 골프'입니다. 명랑 골프는 룰을 엄격히 따지거나 스코어에 연연하지 않고 동반자와 편하게 즐기는 골프를 말합니다.

 

원래 골프는 심판의 자격 등급까지 나눠질 만큼 복잡하고 엄격한 룰이 적용되는데요. 플레이어도 그 룰을 철저히 지켜야 하죠. 그랬던 골프 문화가 팬데믹을 지나며 야외에서 즐길 친목 활동을 찾는 젊은 사람들이 골프에 관심을 가지면서 크게 바뀌었어요. 이들은 스포츠의 진지함보다는 취미의 재미를 우선시한답니다.

 

최근 갑자기 인기가 높아진 위스키도 주목할 만한데요. 과거 위스키는 취하기 위해 마시는 독주나 비싸고 고급스럽지만 딱딱하고 고루한 '아재 술'의 이미지가 강했다면, 요즘은 하이볼이나 칵테일로 만들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술이 됐어요. 전통주도 마찬가지인데요. 전통을 잇는 진지하고 깊이 있는 접근 대신, 과일을 첨가해 예쁜 색감을 내거나 귀여운 일러스트가 그려진 라벨을 입히는 방법으로 신선하고 다가가기 쉬운 술로 변신하고 있어요.

 

즐거움을 주는 또 다른 방법은 놀이로 만드는 것인데요. 최근 유행한 '무지출 챌린지'는 놀이화의 대표적 사례예요. 교통비를 쓰는 대신 걸어 다니거나 외식 대신 도시락으로 식사를 해결하며 하루 지출을 0원으로 만드는 도전 과제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어려움을 절박하게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야무지게 '퀘스트'를 달성하는 게임 플레이어처럼 그 과정을 놀이화합니다.

 

네버랜드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대상은 '캐릭터'인데요. 재미있고 귀여운 캐릭터가 수시로 등장하고 있어요. 2014년 서울 잠실 석촌호수에는 거대한 '러버덕'이 출현했는데, 어린아이의 목욕용 장난감인 오리 인형 러버덕이 난데없이 등장하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열광했어요. 이 노란 오리를 보기 위해서 한 달 동안 500만 명의 사람들이 석촌호수로 모여들었답니다. 롯데홈쇼핑의 벨리곰, 현대백화점의 윌리와 함께 '국민 캐릭터'가 된 카카오프렌즈의 라이언과 춘식이 역시 댄스 듀오를 결성해 활동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답니다.

 

# 사회적 나이 사라진 ‘벤자민 버튼’의 삶

네버랜드 신드롬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미래가 불안정하고 힘든 상황에서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어 위안을 얻는 것이기도 하고, 팬데믹과 같은 절대 불안을 안고 집에 머무르다 보니 성인 장난감 시장이 크게 성장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추억의 아이템에 몰두함으로써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행복의 요인을 찾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탓에 노인으로 태어나 아이로 죽는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이야기가 현대인 모두의 로망이 된 배경에는 우리 사회의 근본 변화가 자리하고 있어요. 바로, 사람들이 더 오래 살게 됐다는 것이죠.

 

인간 수명이 길어지면서 생애 주기도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는데요. 100년 전 일생은 대략 50만 시간이었는데, 현대인의 삶은 70만 시간 정도로 늘었어요. 일생을 24시간으로 보는 '인생시계' 개념으로 환산하면, 인류의 평균수명이 60세일 때 40세는 오후 4시이지만 평균수명이 80세일 때 40세는 정오에 불과합니다. 100세가 되면 정오는 50세인 셈이죠.

 

의학 발전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추가시간은 노년이 아닌 청년기의 연장으로 이어져요. 과거 아이와 어른의 단순한 이분 구조였던 인간의 삶은 이제 청년-노년으로, 이후 청년-중년-노년으로, 21세기부터는 청년이행기-청년-중년-연소노인-고령노인으로 새롭게 정의되고 있답니다. 사회활동에서 은퇴하는 '진짜' 노년은 줄고, 일하고 즐기는 청년기가 늘어나게 되었답니다.

 

생애과정이 더욱 복잡해지면서 어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평균적인 삶의 모습도 사라졌어요. 더 오래 교육을 받는 사람이 늘고 결혼과 출산 경험은 개인 선택에 따라 없을 수도, 시점의 편차가 20년까지 벌어질 수도 있죠. 급변하는 사회 환경과 긴 청년기 속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배움의 단계로 돌아가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취업, 부모되기, 자가마련, 은퇴처럼 “이 나이쯤엔 무엇을 한다"는 식의 '사회적 나이' 개념이 흐려지고 있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비야르는 현시대를 끊음과 이음을 반복하는 '단속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현대사회의 불규칙한 박동'이 현대인에게 한 직장에 오래 머무르지 말고 끊임없이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한다는 것이죠. 변해야 살아남는 시대에 사람들은 '청년-중년-노년'의 단계가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삶이 아니라, '생애1-생애2-생애3-…'으로 여러 차례 끊고 다시 시작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2025년이면 대한민국은 만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초고령 사회를 목전에 두고 네버랜드 신드롬을 앓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인데요. 나이 들기를 거부하는 네버랜드 사회는 여러 미성숙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긍정적인 전망도 함께 보여줘요.

 

국민의 생물학적 나이가 많아진다 해도 시장과 사회 분위기가 활기를 잃지 않고 역동성을 띨 수 있기 때문이죠. 소비의 피터팬화는 개인에게도 좋은데요. 불안이 팽배한 사회 속에서 어린 시절의 향수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어른의 삶과 무관한 재미는 어른으로 살며 얻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창구가 됩니다.

 

어쩌면 어른이란 인간 발달의 특정 '시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삶의 지향을 향해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민은 "요즘엔 사람들이 도무지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한탄이 아니라, "어떻게 어린이 같은 삶의 경이를 잃지 않으면서도 경험의 지혜를 일생을 통해 켜켜이 쌓아 올려갈 수 있을까?"여야 할 것입니다.

 

젊음을 미화하고 우상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짜 어른을 만나기 힘든 오늘날, 유아적이고 무책임한 자기중심주의가 아닌 청년의 신선함과 발랄함을 가슴에 품을 때, 우리는 청춘의 열정과 어른의 지혜를 조화시킬 수 있고 개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진정하게 성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료: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