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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일상으로부터의 비움, <대구 군위 사유원 #2>

숨 가쁜 도시의 삶에서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의 쉼터, 품위와 격조를 갖춘 오롯한 공간과 장소가 있어요. 수목, 원림, 물, 바위, 언덕, 바람, 계절의 자연 속에서,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사유적 이름의 건축과 공간을 사색하는 사유원입니다. 사유원은 장대하게 펼쳐진 자연 풍광 속에서 좋은 기운을 받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곳입니다. 지난 달 1편에 이어 사유원의 열 일곱 지점의 경이로운 산책을 이어갑니다.

 

# 8. 한유시경, 시인의 경지에 이르다

팔공청향대 고개를 넘으면서 지금까지 이어지던 리기다 소나무의 상록 숲 길이 다른

 

우리나라 시골 마을 어디를 가나 마을 어귀에는 큰 정자나무가 있는데요. 느티나무일 때가 많죠. 느티나무는 수관(樹冠)이 크고, 고루 사방으로 퍼져 짙은 녹음을 만들며, 병충해가 없고 가을에는 아름답게 단풍이 들어요.

 

정자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경험을 전달하는 광장으로, 때로는 서당의 선생이 강학을 하는 자리로, 우리 사람들의 애환이 집결된 정겨운 곳이라 할 수 있답니다.

 

사유원은 여기 느티나무 정원을 '한가로이 노닐면 시인의 경지에 다다르는 곳'이라는 의미로 '한유시경(閑遊詩境)'이라고 불러요.

 

▲ 조사

느티나무숲을 거닐다 보면 숲 가장자리 연못 곁에 대나무로 높이 세운 ‘조사(鳥寺)'가 눈에 띄어요. ‘새들의 수도원’입니다.

 

비무장지대(DMZ)의 설치미술 프로젝트로 기획된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으로, 새를 불러 모으다가 세월이 지나면 썩어 넘어져 자연으로 되돌아가도록 만들었어요.

 

# 9. 사담, 사색하는 연못

새들의 수도원 '조사'를 돌아내려가면 물의 정원 '사담(思潭)' 앞에 멈춰 서게 돼요. 하늘을 반영하고 숲을 투영하는 산중의 연못, '사색하는 연못'인 사담의 그윽하면서도 절묘한 공간이 탄성을 자아냅니다.

 

깊은 계곡의 풍치, 수생식물과 비단잉어의 연못, 춤과 음악이 펼쳐지는 데크, 마주하는 느티나무숲 한유시경, 모두에 열린 레스토랑, 사담은 사람이 만든 자연의 정수라는 자랑에 동의할 수밖에 없어요.

 

사담에는 연못가에 공연장 겸 레스토랑이 놓여 있어요. 데크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연못 건너편 느티나무숲 벤치에서 관람해요.

 

60석 규모의 레스토랑 ‘몽몽미방’에서는 느티나무숲의 한가로운 풍경과 낙조를 바라보며 사유원 헤드 셰프가 정성껏 조리한 양식 코스를 즐길 수 있어요.

 

사유원을 여행하는 동안 젊은 날 우리의 지향이 ‘사유하는 삶’이었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밥벌이에 쫓겨 언제부턴가 사유를 멈추면서 우리의 지향도 흐려졌던 것이죠.

 

무심히 지나친 현장, 손 내밀지 못한 관계가 사유하지 않은 시간의 타격을 입고 붕괴하고 소멸해갑니다. 사유는 이억 만리 떨어진 곳의 파괴와 소생에서 의미를 불러오고, 소식조차 닿지 않는 관계에서도 의미를 길어올려요.

 

# 10. 유원, 감성을 담은 한국정원

사유원 지도에 찍힌 열 일곱 곳은 저마다의 풍경을 담고 있어요. 그것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상상을 넘어서는 공간이 나타나요.

 

사담의 레스토랑 주차장 쪽으로 나와 오른쪽 돌계단을 오르면, 갑자기 전통 담장이 둘러서 있답니다. 담 벼락 너머로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져요.

 

설립자의 소나무와 돌 컬렉션을 계곡에 모아 한국 정원 '유원'을 조성했어요. 유원은 우리나라 최고의 원림으로 꼽히는 담양 소쇄원의 감성을 담아 물줄기를 흐르게 하고 모았습니다. 솔향기와 물소리가 어우러진 풍류의 공간이죠.

 

중심에 있는 전통 한옥 ‘사야정’에 앉아 내다보는 풍광은 과연 독보적이에요. 정자와 팔공산 비로봉 사이의 기운을 둘러싸고 주변 풍광을 적당히 열고 닫았습니다.

 

오묘한 곡선미를 뽐내는 소나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비춰줄 것 같은 계곡과 연못, 원경에는 물들어가는 느티나무숲 '한유시경'과 그 너머 구름을 살짝 이고 앉은 팔공산이 퍽 드레가 있어 보여요.

 

시원한 마룻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땀을 식혔습니다.

 

# 11. 내심낙원,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낙원

유원에서 소사나무가 늘어선 언덕을 오르면, 노간주나무가 입구에서 맞이하는 하얗고 아담한 경당이 자리 잡고 있어요.

 

사유원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내심낙원’(內心樂園)'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혼란과 격변을 거치며 한국 가톨릭 문필가로 활동한 김익진과 그와 영혼의 우정을 나누던 찰스 메우스 신부를 함께 기리는 경당이랍니다.

 

김익진(1906~1970) 선생은 1930년대 중국에서 유학하며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1934년경 조선에 돌아온 뒤 천주교에 귀의했어요.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그는 1937년 11월에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 초기 회원이기도 해요.

 

개화기의 개혁적 관료이자 장성군수 등 지방관을 지낸 김성규(1863~1935)의 셋째 아들인 김익진은 아버지로부터 대토지를 물려받았지만, 해방 직후에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줬어요.

 

그 이후에는 대구에 살면서 주로 가톨릭계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고, 한국 천주교에 영향을 끼친 다양한 글과 중국 종교학자 우징숑의 『내심낙원』 등 여러 번역서를 남겼죠. 검소하게 노년을 보내다 1970년에 선종했어요.

 

김익진과 찰스 메우스의 우정은 우징숑의 '내심낙원' 뜻과 함께 여기 사유원에 간직된 셈입니다. 김익진은 현해탄에서 배우 윤심덕과 동반 투신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주인공 김우진의 동생이자 사유원 설립자 유재성 회장의 장인이기도 해요.

 

'내심낙원'은 '소요헌', '소대'와 함께 사유원에 있는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의 세 작품 중 하나인데요. 시자가 설계한 성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내심낙원’은 ‘사유의 깊이’에 다다를 수 있는 건축물이에요.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탁자, 회색 벽면, 윗부분이 생략된 T자형 십자가, 그리고 외부에서 스며드는 한줄기 빛만이 성스러운 공간을 채워요.

 

삿된 마음을 내려놓고 고독 가운데 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낙원은 저 멀리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나누는 자의 마음에 싹트는 현세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경당에서 나오면 유원과 한유시경 너머로 내세와 현세의 사이 어디쯤에 팔공산이 솟아 있어요.

 

# 12. 소강탄금대, 텅 빈 극점

사유원은 해발 1193m 팔공산 비로봉과 산맥을 차경해요. 현암, 금오유현대, 팔공청향대, 대붕대 같이 곳곳에 조성된 전망대와 벤치에서 해가 뜨고 지는 하루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평화롭습니다.

 

내심낙원에서 해발 330m 산책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만나는 '소강탄금대(啸崗彈琴臺)'도 그중 한 곳입니다. 계곡 너머로 거쳐온 소대와 현암을 품은 소유원 전경에서 안식을 얻어요.

 

"텅 빈 극점에 도달해 고요함을 철저히 지키면 만물이 아울러 일어난다"라고 한 노자 「도덕경」의 말에 수긍이 갑니다.

 

외진 곳에 있는 소강탄금대는 한갓져서 ‘사유’의 나무 한 그루 심어 놓고 돌아 나오기 안성맞춤이죠.

 

# 13. 첨단, 별을 보는 제단

소강탄금대를 돌아 내심낙원 쪽으로 해발 350m까지 오르면 하얀 성채 모양의 작은 망루가 보여요. 현암, 사담, 금오유현대 등과 함께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작품입니다.

 

사유원의 여러 부대시설은 사유원의 정체성을 이루는데, 이 중 전체 부지에 물을 공급하는 큰 수조 두 곳이 있답니다.

 

하나는 땅속에 파묻고 그 상부를 작은 마당으로 만들어 풍설기천년 모과원을 위한 전망대 역할을 하게 했어요. 또 하나는 어쩔 수 없이 땅 위로 구조물이 올라왔는데 이를 감안하여 사유원 동쪽을 조망하는 전망대가 되었어요.

 

승효상은 사유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두 번째 수조에 콘크리트를 입혀 작은 망루를 만들었어요. '별을 보는 제단'이라는 뜻을 가진 '첨단(瞻壇)'입니다.

 

첨단은 벽체를 타고 오르는 계단과 함께 콘크리트를 여러 조각으로 분절해 작은 성채 모습을 하고 있어요. 지붕 바닥에는 사유원을 둘러싼 하늘과 땅의 지도를 새겨 놓았죠. 신라 시대부터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묘나 불탑에 새겨온 12지신과 함께 12개 산과 산까지의 거리가 기록돼 있어요.

 

가까이는 사담 연못가에 있는 조사와 몽몽미방, 한유시경의 느티나무숲 아래 벤치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첨단의 서쪽은 초지 벌판으로 돌로 만든 '현빈지문'과 짝을 이루며 우주의 기운이 깃든 듯한 장소를 형성해요. '현빈지문'은 '세상 만물의 근원'이 되는 문이란 뜻이랍니다.

 

창평저수지 앞 치허문에서 오르기 시작한 걸음이 사유원의 가장 높은 수조 위까지 닿았으니 4시간 동안 물길을 거슬러 오른 셈입니다. 이제 세상 만물의 근원이 되는 물을 따라 다시 흘러내려야 할 반환점에 이르렀어요.

 

# 14. 가가빈빈, 열린 풍경을 담다

사유원 가장 높은 곳에 수평의 자태를 간직한 '가가빈빈(嘉嘉彬彬)'이 있어요. '아름답고 빛난다'라는 뜻을 담은 이곳은 지세와 풍광, 편안과 긴장의 균형을 이룬 쉼터인데요.

 

예상 보다 한 시간 정도 지체되어 쫓기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습니다. 창가 자리 하나를 골라 앉아 점심을 먹고 사유원에서 얻은 단상을 노트북에 옮겨 적었어요.

 

가파도 프로젝트를 맡았던 원오원아키텍츠의 최욱 건축가가 팔공산 비로봉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카페 ‘가가빈빈’을 지었어요. 바짝 땅 가까이 있는 모양과 부유하는 평지붕은 그가 설계한 가파도 터미널을 상기시켜요.

 

가가빈빈은 지형과 풍경에 중심을 두고 건축을 땅의 연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했고, 사방으로 열린 풍경을 바라보도록 계획했어요. 큰 창 너머로 사유원과 팔공산의 멋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새삼 감탄이 나옵니다.

 

이 조망을 최대한 담아내기 위해 위치를 신중하게 골랐을 텐데요. 최욱은 실내 조망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코어를 최소화하고 슬래브를 장스팬으로 최대한 뽑아내는 다소 실험적인 시도를 했어요. 평평하고 넓은 지붕을 최소한의 코어 두 개로 받치고, 그 사이 공간을 투명한 유리로 감쌌습니다.

 

이를 통해 시야를 가리는 기둥을 완전히 제거했고, 창호의 세로 프레임마저 유리로 투명하게 처리해서 장쾌한 시야를 확보했어요. 여기에 내부에 사용된 짙은 회색 계열의 콘크리트는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 창밖 풍경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요.

 

가가빈빈에는 풍설기천년에서 채취한 모과로 담근 차도 있어요. 사유원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정취입니다.

 

▲ 탁족

걷기는 이동하면서 하는 은둔입니다. 걷는 것은 주변 풍경과 교감하고 내부로 침잠하는 사유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인데요. 걷는 동안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어요. 걷기를 통한 사유는 복잡한 일상으로부터의 비움이기도 하죠.

 

걷기는 삶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가가빈빈 앞 행구단과 능허대에는 발을 씻는 탁족대가 있어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물에 발을 담갔습니다. “차갑다”

 

탁족, 속세에서 시달렸던 마음이 지나는 바람에 흩어져요.

 

예수가 제자의 발을 씻긴 손길이 이랬을까요? 오랜 걸음으로 열 오른 발을 어루만집니다. “애썼다, 수고했다.”

 

# 15. 명정, 성소를 품은 피안의 세계

사유원의 설립자는 건축가 승효상에게 사유원 안쪽 깊은 곳을 지정해 한눈에 숲을 내려볼 수 있는 전망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어요. 사유원을 기획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승효상은 이곳에 초입에 있는 소요헌과 대구를 이루는 상징적인 장소를 만들었죠.

 

돌문을 지나 두터운 콘크리트 외벽을 끼고 경사면을 오르면 전망대로 들어서는 좁은 통로를 만나요. 곧 작은 문 안쪽으로 둥근 계단이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고 있죠. 우선 올라가는 방향을 선택했어요.

 

전망대의 꼭대기에 올랐지만 사유원 전경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승효상은 높이 오르는 전망대 대신 방문자를 땅속으로 데리고 들어가요.

 

명정은 지하로 파 내려간 건축물인데요. 회랑을 만들고, 물을 가두고, 벽의 질감을 다듬고, 해의 기울기에 따라 스미는 빛이 변주되도록 해 경건한 느낌의 공간을 빚어냈어요. 수목원 산책길의 마지막쯤에 지금까지 봐 온 경관을 다시 되새김하는 성찰의 공간으로 전망대를 구현한 것입니다.

명정에는 사유원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길에 아름다운 숲을 섭렵했으니 이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라는 건축가의 뜻이 담겼어요.

 

'눈 감고 사유하는 뜰', '명정(瞑庭)'은 현생과 내생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잊고 오로지 하늘만 보이는 마당, 물이 흐르는 망각의 바다와 붉은 피안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고, 작은 성소와 삶의 좁은 통로로 둘러싸여 있어요.

 

내부로 향한 좁은 통로를 들어서면 맑고 신비로운 물소리가 들려요. 한쪽 벽면을 융단처럼 덮으며 흘러내리는 물이 커다란 사각형 수반 위로 떨어집니다. 수면을 투과한 햇살에 조약돌이 반짝여요.

 

물이 흘러내리는 벽을 지나 회랑으로 들어서면 묵직한 침묵의 공간이 이어져요. 기도실 같은 작은방들이 붙어 있죠. 삶과 죽음, 영생을 생각하는 공간이에요. 영생이란 찰나를 의식하는 것이랍니다.

 

깊은 내면에 머물다가 다시 벽 사이로 난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명정에서 정향대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비로소 사유원의 전경이 현실로 펼쳐집니다. 여전히 사유원은 한적하고 고요해요.

 

침묵이 언어의 비움이라면, 여백은 공간의 비움이고, 사유는 의식의 비움이에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 16. 정향대, 매화 핀 그림 속에서

▲ 우봉 조희룡의 <매화서옥도>

아직 산에는 흰 눈이 남아있고 마른 가지만 흩어져 을씨년스러운 풍경 속에서 화사한 매화가 피어 있어요. 마치 어두운 계절을 통과한 축복처럼 매화 꽃잎이 눈꽃처럼 흩날리며 번져 나옵니다.

 

매화나무 아래에 작은 집이 있는데요. 방안에 앉은 선비는 책상 위에 서책을 쌓아 두고 매화 한 가지를 꽂은 화병을 놓았습니다. 등을 보이고 앉은 선비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매화에요. 방안은 밝고 환해요. 방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매화의 화사한 생명력일 텐데요. 이 매화를 바라보는 선비의 반가운 마음 역시 방안을 환하게 만들 것입니다.

 

조선 후기 화가 조희룡이 그린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의 모습입니다.

 

민불이 바위에 앉아 먼 팔공산을 바라보고 있는 정향대(呈香臺) 아래는 온통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어요. 정향대부터 시작되는 내리막길 이름은 '매화나무길'. 길은 매화나무숲을 가로질러 '유원'까지 이어져요.

 

이 매화나무길은 조희룡의 <매화서옥도>에 영감을 받아 조경가 정영선이 설계했고, 건축가 승효상은 이곳에 '현매헌(娊梅軒)'을 만들어 놓았어요.

 

비워내고 비운 자리에 새로운 향을 채웁니다. 마음속에 더께처럼 묵혀 있던 수많은 고민과 근심을 풀어내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과 이정표를 사색하며 걷는 길. 매화나무길을 따라 '유원'을 거쳐 '사담'으로 내려왔어요.

 

# 17. 오당/와사, 깨달음을 얻는 연못과 수도원

사담에 모였던 물은 다시 창평저수지 방면으로 흘러내려요. 계곡을 따라 경사진 딱따구리길을 내려가다가 발걸음을 멈췄어요. 훤칠한 미루나무가 서 있는 연못가 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졌습니다. 사유원은 마지막 한 곳까지 감탄을 불러오는구나 싶어요.

 

아침부터 하루를 꼬박 걸어온 '사유'와 '명상'의 길은 이곳에서 '기도'와 '깨달음'의 공간을 만나요. '깨달음을 얻는 연못', ‘오당’(悟塘)'의 낙차를 따라 붉게 물든 철판이 접혀 흘러갑니다. 명상의 수도원이 '물 길 따라 누웠다' 하여 ‘와사(臥寺)'라 부르는 곳입니다.

 

코르텐강 박스를 세 개의 연못을 가로지르도록 비뚤배뚤 이어 붙여 지은 와사는 계곡 위를 거닐게 해줘요. 구조물 천장과 벽면에 뚫린 크고 작은 동그라미 구멍으로 스며든 빛이 해의 기울기에 따라 움직이며 바닥과 벽에 무늬가 돼 찍힙니다. 이 역시 공간의 본질에 몰두한 승효상의 작품입니다

 

굽은 계단 앞에는 소요헌에서 보았던 예수 얼굴의 전신이 불타는 듯한 하늘 아래 못 박혀 있고,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게 삐죽 나온 데크 끝에는 내심낙원에서 보았던 T자형 십자가가 두 팔 벌려 한풀 꺾인 오후 햇살을 맞고 있어요.

 

마음이 뭉클하여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방향과 이정표라는 것이 있을까요. 다시 살 길이 찾아질 때까지 열심히 걷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처럼 흘러 오당/와사에 닿았습니다. 장벽은 사라지고 기다란 창만 남아 햇살을 들이고 있어요.

 

의자 아래 무릎을 꿇는다. 가장 낮은 곳에 이르렀는데 소요헌에서 우러러보던 높은 창 위에 서 있는 느낌이에요. 어쩌면 이 창을 통해 눈부신 햇살 속으로 나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 대구 군위 사유원 방문 팁

▲ 오당/와사의 겨울

사유원은 사계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어요. '세계에서 하나뿐인 자연 속 미술관' 사유원 입장은 300명 하루 제한되어 있고, 사유원 누리집이나 네이버에서 예약할 수 있는데요. 운영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고 마지막 입장 가능 시간은 오후 3시예요. 매주 월요일에는 휴원합니다.

 

사유원은 팔공산 자락에 있어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쉽지 않아요. KTX 동대구역에 내리면 인근에 공유 차량을 이용할 수 있는 쏘카존이 11곳 있어요. 동대구역에서 차로 50분가량 소요됩니다.

 

대구 군위 사유원

• 주소 : 대구 군위군 부계면 치산효령로 1176

• 방문시간 : 매일 09:00 - 17:00 (매주 월요일 정기휴무)

• 입장료 [평일] 성인 50,000원 / 학생(초,중,고) 45,000원 ,[주말, 공휴일] 성인 69,000원 / 학생(초,중,고) 62,000원

• 주차장 : 무료

• 문의 : 0507-1317-1371

 

▲ 오당/와사

사유원에는 지도에 찍힌 열일곱 곳을 찾아 나서는 흥미진진함이 있어요. 기대를 채우고 상상을 넘어서는 공간과 시간이 펼쳐집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도 그러하리라 신뢰해요. 떠나고 만나고 의미를 발굴하는 길 위의 애씀을 다짐합니다.

 

사유원의 숲길은 내 안의 숲길을 사유하는 순례길이에요. 나를 마주하는 내 안의 숲, 사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