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평론가 황광해의 식유기
화첩 속 음식이야기①
밥 한그릇
By동대리
‘밥’은 쌀로 지은 것이다? 맞다. 그러나 틀렸다. 쌀로 지은 밥은 ‘이밥’이다. ‘이밥에 고깃국’은 쌀밥에 쇠고기 국을 말한다. 이밥이 아닌 밥도 있다. 지금 우리가 잡곡이라고 부르는 것들로 지은 밥도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밥이 더 흔했다.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이라고 표현한다. 오곡이 있었다. 밥 중에는 오곡으로 혹은 오곡 중 여러 가지를 섞어서 짓는 것도 있었다. 오곡 중 한두 가지와 나물류 등을 섞어서 지은 밥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시래기밥, 무밥, 콩나물밥 등이다. 그중 시래기밥은 조선시대에도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었던 밥이다. 글| 황광해 칼럼니스트
쌀로 짓지 않은 밥?
1487년(성종 18년) 9월11일 강원도 양양 도호부사 유자한이 성종의 ‘강원도 행’을 연기할 것을 건의한다. 그 이유가 간단하다. 임금이 가을에 강원도에 오면 농사꾼들은 일을 하지 못한다. 가을에 먹을 것을 비축하지 않으면 겨울나기가 힘들다. 그러니 ‘국왕의 행차’를 내년으로 연기하자는 것이다.
“강원도(江原道)는 풍년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지축(旨蓄)과 토란이나 밤으로 겨우 한 해를 넘길 수 있으므로, 민간에서 상수리 수십 석(石)을 저장한 자를 부잣집이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지축’은 채소의 잎사귀 등을 이르는 말이다. 주로 배추나 무를 말린 ‘시래기’를 말한다. 얼마간의 곡물에 시래기를 넣고 지은 밥이 바로 시래기밥이다. 토란, 밤, 도토리, 메밀가루 등도 넣었을 것이다. ‘이밥’은 뽀얀 쌀밥이 아니다. 현미든 백미든 쌀로 지은 밥은 모두 이밥이다. 이밥이 아니면? 잡곡이나 채소, 견과류 등을 사용했다. 수십 년 전까지도 강원도 깊은 산골의 처녀는 “시집가기 전, 쌀 세말을 못 먹는다”고 했다. 그만큼 쌀이 귀했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글에는 ‘닭과 기장밥’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닭[鷄]과 기장[黍]으로 지은 밥에 얽힌 약속[約] 즉, 계서약(鷄黍約)이다. 계서약은 우정을 의미한다. 중국 후한 때 사람인 범식(范式)과 장소(張劭)는 태학에서 같이 공부하며 깊은 우정을 나눈다. 두 사람은 오랜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범식은 장소와 헤어지면서 “2년 뒤 9월15일 그대 집에 찾아가겠다”고 약속한다.
마침내 그날, 장소는 이른 아침부터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었다. 장소의 부모는 “범식의 고향이 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인데, 어찌 그가 올 수 있겠느냐? 괜한 짓”이라고 했다. 장소는 “범식은 신의가 있는 선비이니,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했다. 장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식이 도착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닭과 기장밥’의 우정을 부러워했다. 친구가 찾아오면 ‘계서(鷄黍)’를 준비한다는 표현을 썼다.
▲(좌) 주막, 《단원 풍속도첩》. 한 남자가 거의 밥을 다 먹은 듯 커다란 밥그릇을 기울여 숟가락으로 밑에 남은 밥을 먹고 있다. (본 저작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주막, 《단원 풍속도첩》’을 이용하였습니다)
▲(우) 점심, 《단원 풍속도첩》. 식사중인 일꾼들의 다양한 모습이 자연스럽고 푸근하다. (본 저작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점심, 《단원 풍속도첩》’을 이용하였습니다)
‘‘이앙법(移秧法)’ 등을 통하여 조선후기에는 쌀의 생산량이 증가한다. 일반 서민들이 쌀을 만나는 것은 조선후기부터 좀 더 쉬워졌다. ‘이앙’은 모내기를 말한다.
조선후기의 그림들에 ‘밥’이 나타나는 것도 이 무렵부터다. 곡물로 지은 밥을 먹는 일이 비교적 쉬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김홍도의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契圖)’에는 모두 64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개성 만월대에서 있었던 이날 잔치의 주인공은 바로 기로(耆老), 나이든 노인들이다. 노인들에게 밥상이 하나씩 놓여 있다. 밥상 위에는 예닐곱의 그릇이 놓여 있다. 한식은 독상(獨床)이 원칙이다. 한식 밥상의 기본은 탕반(湯飯)이다. 아마 상세하게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노인들은 ‘밥과 국이 있는 잔치 음식상’을 하나씩 받았을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 ‘점심’은 푸근하다. 반찬은 거의 없는 맨밥이다. 왼쪽의 사내가 겨우 반찬을 바닥에 놓고 집어먹는다. 다른 인물들은 밥그릇을 쥐고 밥만 먹는다. 하지만 모두 넉넉하다. 그림 오른쪽 아래의 꼬마도 그릇을 쥐고 열심히 퍼먹고 있다. 밥을 먹지 않는 사람은 아낙 한 사람뿐이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넉넉하고 푸근하다.
밥에도 종류가 있다
밥에도 종류가 있다. 임금님의 밥은 ‘수라’다. 어른들은 ‘진지’를 드시고, 제사상에는 ‘제삿밥’이 오른다. 밥을 높여서 ‘메’라고도 했다. 들판의 일꾼들은 ‘들밥’을 먹는다. ‘강밥’은 억지로 먹는, 반찬이 없는 밥이다. ‘맨밥’이라고도 한다. 죄수들은 ‘구메밥’을 먹는다. 요즘의 ‘콩밥’이다. 물에 만 밥은 ‘수반(水飯)’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성종이 수반, 물에 만 밥을 좋아했다. 국왕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음식을 먹는 것은 아니다. 국왕은 가뭄, 홍수, 강추위 등 나라의 천재지변이 있거나 궁중의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반찬을 줄였다. 고기나 사치스런 반찬,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줄였다. 감선(減膳)이다. 그러나 마냥 줄일 수는 없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신하들이 복선(復膳)을 건의한다. 임금이 물에 만 밥을 자주 먹으면 이 역시 신하들이 경계하는 것이다. 신하들이 “자꾸 물에 만 밥을 드시지 마시옵소서”라고 하지만 성종은 자주 물에 만 밥을 먹는다. ‘국왕의 수반’을 두고, 조선왕조실록에 몇 차례나 공식적으로 기록했다. 밥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눈칫밥이나 ‘되지기’는 슬프다. 되지기는 밥을 새로 지을 때 위에 식은 밥을 얹어서 데우는 것이다. 식량이 부족한 시절, 우리는 되지기를 먹으며 살았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 들판의 모내기는 중노동이다. 이때 먹는 밥은 ‘못밥’이다. 일꾼들은 하루세끼의 식사로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챙길 새참은 없다. 막걸리 한두 주전자를 얹어서 아침과 점심 사이 혹은 점심과 저녁 사이에 한 번 더 밥상을 차린다. 새참 혹은 낮참이다. ‘사이’에 먹는 식사라서 새참이고 낮에 먹는다고 낮참이다. 세상 어디에도 밥의 종류를 이토록 상세하게 가른 나라는 없다.
독특한 ‘밥’상이 있는 집
최근 밥을 잘 짓는 식당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중 독특한 밥을 내놓는 집을 몇 곳 소개한다. 강릉의 ‘서지초가뜰’에서는 ‘반가에서 일꾼들을 위해서 차린 밥상’을 만날 수 있다. 모내기철의 못밥과 ‘질상’이다. 남은 모내기 용 씨앗으로 떡을 하면 ‘씨종지떡’이다. 씨종지떡과 들밥 등이 특이하다.
▲ 서지초가뜰에서는 옛날 마을 일꾼들에게 정성을 다해 차려내던 질상을 그대로 내놓고 있다.
경북 안동의 ‘계림식당’과 전북 익산의 ‘소주한잔’은 냄비밥이 아주 좋다. 냄비밥의 매력은 고슬고슬한 밥과 누룽지다. 누룽지는 식사이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후식이다. 냄비밥과 더불어 끓여먹는 누룽지가 매력적인 집들이다. ‘계림식당’에서는 냄비밥을 된장찌개와 비벼 먹을 수 있다.
▲ 계림식당(왼쪽)과 소주한잔(오른쪽)은 구수한 맛이 있는 냄비밥을 내놓는다.
서울, 경기권에서는 김포 ‘구이랑’의 냄비밥을 추천한다. 이 가게는 냄비밥과 더불어 점심 메뉴로 시래기밥도 추천할 만하다. 삼겹살집에서 만나는 냄비밥은 각별하다.
▲ 구이랑(왼쪽) 냄비밥과 가현생고기(오른쪽) 한우된장술밥
인천 송도의 ‘가현생고기’에서는 술밥을 만날 수 있다. 정식 명칭은 ‘한우된장술밥’이다. 고기 손질할 때 나오는 한우 ‘칼밥’과 된장으로 ‘술밥’을 만들었다. 술밥은 술안주도 되고 식사도 된다. 죽보다는 뻑뻑하다, 마치 이탈리아식 리소토 같은 느낌을 준다.
본문에 소개된 맛집 정보
맛집 정보
1 서지초가뜰: 강원도 강릉시 난곡길76번길 43-9 / 033-646-4430
2 계림식당: 경상북도 안동시 경동로 726 / 054-859-3913
3 소주한잔: 전라북도 익산시 군익로 517 / 063-854-1911
4 구이랑: 경기도 김포시 돌문로62번길 13-11 / 031-997-9294
5 가현생고기: 인천광역시 연수구 컨벤시아대로 100 / 032-851-3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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