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평론가 황광해의 식유기
화첩 속 음식이야기⑥
생선이 주는 위로
By동대리
‘임금님께 진상한 물고기’라는 표현이 있다. 엉터리다. ‘임금님께만’ 진상한 물고기는 없다. 채소, 과일, 고기, 생선도 임금님만 먹었던 것은 없다. ‘공물(貢物)’은 오늘날의 세금이다. 각 지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것을 세금, 공물로 바쳤다. “우리 지역에서는 잡히지 않는다”고 하면 다른 생선으로 바치기도 했다.
조선시대 가장 많이 먹었던 생선
조선시대 선조들은 어떤 생선을 먹었을까? 국왕부터 사대부, 서민, 노비들까지 가장 많이 먹었던 생선은 조기(석수어), 청어, 명태, 대구, 민어, 멸치 등이었다. 교산 허균(1569-1618년)은 <도문대작>에서 여러 가지 생선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는 “조기, 민어 등은 너무 많은 곳에서, 너무 많이 잡히기 때문에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특정지역에서 나오는 진상품 조기는 없었다.
조기는 한반도 남서해안에서 널리 잡혔다. 냉장, 냉동 시설이 없었던 시절이다. 말린 생선이 널리 사용되었다. 조기 역시 말린 것, 굴비 형태였다. 임금이나 궁궐에서 “어느 지역에서 나는 특별한 생선을 궁중으로 보내라”는 일도 없었다. 폭군 연산군 정도가 특별한 먹을거리를 궁중으로 보내라고 했다.
▲ 명태는 조기, 청어와 더불어 고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흔했던 생선이다.
명태도 흔했다. “뇌물로 ‘명태 5태(駄)’를 받았다”는 표현도 있다. ‘태(駄)’는 ‘말 한필에 실을 정도의 양’이라는 뜻이다. 일개 관리에게 준 뇌물이 ‘말 5마리에 실을 정도의 양’이었다. 명태(북어)는 퍽 흔한 생선이었다. 궁중에서는 이 명태를 받아 일상으로 사용하고 한편으로 신하들에게도 나눠주었다. 지방의 나이든 노인들 에게도 명태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44년(1768년) 7월28일의 <영조실록>에는 나이든 영조와 내국의 도제조 김양택 사이의 재미있는 대화가 실려 있다. 영조는 1694년생이니 일흔네 살의, 당시로서는 상노인이다. 김양택은 도제조(都提調)다. 지금으로 치자면 정부 부처의 ‘감독관, 고문’ 정도의 직책이다. 제목도 “음식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다”이다. 집권 44년차의 국왕과 노 신하의 한담이다.
▲ 조기(왼쪽) 병어(오른쪽) 말리는 모습
영조가 말한다. “(요즘 통 입맛이 없는데) 그래도 송이버섯, 생전복, 꿩고기, 고추장 이 네 가지가 맛있으면 밥을 잘 먹을 수 있으니, 내 입맛이 영 늙은 건 아니야?” 김양택이 대답한다. “그러시면 생전복을 ‘복정(卜定)’하겠습니다.” 영조가 답한다. “그만두라. 공자는 일찍이 꿩고기 냄새만 맡고 일어났다고 하더라. 예전에 호남어사가 전복 한 마리를 별도로 구하는 것도 민폐가 된다 하더라.”
‘복정(卜定)’은 ‘법으로 정한 공물, 세금 이외에 별도로, 강제적으로 바치는 먹을거리 등’을 의미한다. 전복 한 마리라도 별도로 받지 않겠다는 임금의 뜻이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1년(1864년) 5월의 기사에서 공물을 바치던 공인들이 말한다. “그동안 대구를 바치다가 대구 대신 북어로 대납했다.” 명태가 잘 잡히던 지역에서 갑자기 명태가 잡히지 않으면 대구로 바꾸기도 하고, 거꾸로도 가능하다. 정 공물을 구할 수 없으면 돈을 가지고 와서 한양에서 공물을 사서 바치기도 했다.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이 바로 공인이다.
“임금님께 진상한 물고기”라는 표현은 엉터리다. 임금님께 진상하지 않은 물고기는 없다. 많이 생산되는 모든 물고기를 궁중과 국왕에게 공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물고기를 어떻게 잡았을까?
단원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 중 ‘어장’이라는 그림이 있다. 바닷가 얕은 곳에 작은 나무 막대기들이 촘촘히, 줄지어 박혀 있다. 마지막 부분에 사람들이 몇몇 서서 뭔가를 떠낸다. 나무막대기 밖에는 작은 배들이 두어 척 떠있다. 정확히는 ‘방렴(防簾)’식 어장이다.
방렴은 물고기를 잡는 편리한 방법이었다. 먼 바다로 나가기 힘든 시절이었다. 배나 그물도 시원치 않았다. 방렴은 조금 먼 바다부터 막대기를 꽂기 시작하여 모래사장 가까운 곳까지 막대기를 촘촘히 꽂으면 비교적 편하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물고기는 ‘후진’이 되지 않는다. 꽂아둔 나무막대기 사이로 들어온 물고기는 바깥으로 나가기 힘들었다. 어부(?)는 꽂아둔 나무막대기의 마지막 주머니 부분에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온 물고기들을 떠내면 된다.
방렴용 나무막대기가 대나무면 ‘죽방렴(竹防簾)’이다. 여수나 충무 등의 ‘죽방멸치’는 바로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라는 뜻이다. 죽방렴에서는 바가지 등 작은 그릇으로 멸치를 떠낸다. 멸치가 상하지 않는다. 방렴은 육지 가까운 곳에 설치한다. 신선도도 보장된다. 방렴을 강에 설치하면 ‘어살(魚箭)’이라고 불렀다. 방렴은 물고기를 잡는 유용한 방식이었다. 멸치뿐만 아니라 청어도 방렴으로 잡았다.
▲ 고기잡이, <단원풍속도첩>. 어장에서 고기를 잡아내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고기떼를 따라 물새들이 날아들고 독을 실은 배 가운데는 솥까지 걸려 있어 풍성한 어장의 분위기를 실감케 한다. (본 저작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고기잡이, <단원풍속도첩>’을 이용하였습니다)
▲ 오늘날 남해의 멸치잡이 풍경, 조선시대에는 방렴으로 멸치를 잡았다.
물고기를 잡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다. ‘어장’이 있다. 큰 그물을 친 다음 시간이 지난 후 그물을 걷는 방식이다. 밀물과 썰물을 따라서 움직이던 청어가 걸려든다. 어조(漁條)는 배에서 그물을 던지고 바로 그물을 당겨서 고기를 건지는 방법이다. 어장과 어조는 사용하는 배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매긴다. ‘20동 짜리 배’ ‘10동 짜리 배’라는 식으로 세금을 매긴다. 1동은 2천 마리다.
방렴 방식은 폐해가 많았다. 함경도의 방렴은 1770년경 영남에서 전래되었다. 그물과 배가 시원치 않던 시절에 방렴은 획기적인 고기잡이 방식이었다. 20년 후쯤, 원산 일대에만 방렴이 190곳으로 늘었다. 물고기 양은 그대로인데 방렴이 많아지니 생산량은 줄어든다. 세금은 그대로다. 방렴 역시 오래지 않아 문제를 일으킨다. 정조 때의 <일성록> 기록에는 “방렴을 없애야 한다”는 북도(함경도) 암행어사의 보고도 있다.
위어소와 소어소
조선시대 물고기 중 재미있는 것은 ‘위어(葦魚)’와 ‘소어(蘇魚)’다. 소어는 밴댕이, 위어는 웅어라고도 불리는 생선이다. 위어는 청어목 멸칫과다. 길이 30cm 안팎의 은빛 물고기로 칼처럼 생겼다. 전어보다는 몸매가 날렵하다. 늦봄ㅋ이나 초여름에 강을 거슬러 올라와 산란한다. 이때가 어획기이다.
▲ 위어(왼쪽)는 늦봄이나 초여름에 강을 거슬러 올라와 산란한다. 소어는 밴댕이다.
궁중에서는 위어와 소어를 위하여 ‘위어소(葦魚所)’와 ‘소어소(蘇魚所)’를 별도로 두었다. 궁중에서 식재료, 음식을 책임지는 사옹원이 직접 관리했다. 행주산성 부근을 비롯하여 경기도 서해안가에 ‘위어소, 소어소’가 있었다. 위어, 소어를 각별히 관리한 것은 한양 도성 가까운 곳에서 생산되는 물고기이기 때문이었다. 날 것으로, 회로 먹을 수 있고 구워서 먹을 수도 있다. 마른 건어물과는 다르다. 위어소, 소어소도 말썽은 있었지만 조선후기까지도 꾸준히 운영된다.
▲ 행호관어(杏湖觀漁), <경교명승첩>. 고기잡이 배들이 바람을 타고 경쾌하게 늘어선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강 일대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 중 ‘행호관어(杏湖觀漁)’라는 그림이 있다. <경교명승첩>은 겸재 정선이 영조의 명으로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겸재의 죽마고우인 사천 이병연의 시가 붙어 있다. “늦봄에는 복어 국이요/초봄에는 위어 회라/복사꽃이 강물 넘치게 흘러오면/행호 밖으로 그물을 던진다”는 시다.
▲ 예나지금이나 밴댕이 소갈딱지다. 쉬 상한다. 결국 싱싱한 회는 위어다.
‘행호’는 한강 중 행주대교 부근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동호=동호대교, 옥수동 부근의 한강’ ‘서호=서강대교 부근의 한강’으로 불렀다. ‘관어’는 물고기 잡이를 본다는 뜻이다. ‘행호관어’는 오늘날 양천구에서 북쪽 행주산성을 보면서, 한강의 위어 잡이 배를 그렸다. 위어나 소어(밴댕이) 역시 왕실부터 일반 서민까지 모두 먹었다. 오늘날에도 밴댕이는 흔하고 위어 역시 5월 중하순 무렵 강화 일대, 전북 익산의 웅포 일대에서 만날 수 있다.
▲ 남해 ‘우리식당’에서는 죽방멸치조림, 회무침 등 남해의 명물을 골고루 맛볼 수 있다.
전북 익산의 ‘원조 우어회’는 봄철 위어(웅어)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웅어회나 찌개 등이 가능하다. ‘우어’는 웅어의 호남, 충청도 서해안의 사투리다. 경남 남해군의 ‘우리식당’은 멸치 전문음식점이다. 멸치회, 멸치쌈밥 등이 가능하다. 멸치구이도 아주 좋다.
▲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통영 ‘어촌싱싱회해물탕’(왼쪽) 부산 ‘선어마을’(오른쪽)
서울에서 위어회를 만나려면 김포 대명리어시장에 가면 된다. 어시장 부근의 몇몇 식당에서 봄철이면 위어 회, 위어구이 등을 내놓는다. 해물탕으로는 통영의 ‘어촌싱싱회해물탕’을 권한다. 양도 푸짐하고 정갈하다. ‘착한식당’으로 선정된 집이다. 선어의 맛을 아는 분들을 위하여 부산의 ‘선어마을’을 권한다. 해산물 공판장 일을 오래한 주인이 추천하는 선어회가 일품이다.
본문에 소개된 맛집 정보
- 맛집 정보
- 1 원조 우어회: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 831 / 063-862-6408
- 2 우리식당: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동부대로186번길 7 / 055-867-0074
- 3 대명리어시장: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대명리 대명포구 인근
- 4 어촌싱싱회해물탕: 경상남도 통영시 도천상가안길 18 동원나폴리빌 / 055-646-1982
- 5 선어마을: 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114번길 17 / 051-255-9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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