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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첩 속 음식이야기③ 서울의 설렁탕

음식평론가 황광해의 식유기

화첩 속 음식이야기③

서울의 설렁탕

By동대리


일제강점기 무렵, 설렁탕은 제일 핫한 음식이었다. 각종 문헌에 설렁탕이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설렁탕은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설렁탕이다. 운이 좋아 유독 돈을 많이 번 인력거꾼 김 첨지는 아픈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사들고 귀가한다. 운수 좋은 날의 설렁탕은 한 동안 국문학도들의 과제이기도 했다. “아내는 죽었고, 개똥이는 죽은 아내 곁에서 울고 있다. 김 첨지는 이 설렁탕을 어찌할 것인가?”가 국문학과의 리포트 주제였다.


잡지 <별건곤>에는 ‘신식 부부는 하루에 설렁탕 두 그릇’이라는 내용이 있다. 유산을 물려받은 룸펜이나 다름없는 부부가 신혼 초에 흥청망청 돈을 쓴다. 돈이 떨어지고 나니 만만한 게 설렁탕이다. 가격이 싸고 어디에나 있다. 늦게 일어나니 밥을 지을 마음도 없다. 오전에 설렁탕을 배달해 먹고 오후에는 모던보이, 모던걸로 단장을 하고 외출을 한다. 저녁에도 설렁탕을 먹는다.


1930년대 당시 설렁탕은 중요한 ‘배달음식’이었다. 당시 신문에 나온 기사 하나. 설렁탕 값을 내놓으라는 배달꾼과 ‘주인이 오면 주겠다’는 사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결과는 주먹다짐이다. 배달꾼은 폭행 가해자다. 이 배달꾼은 종로경찰서에서 “우리 뒤에는 300명이 있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적반하장이다. 당시 경성(서울)에는 설렁탕 배달꾼이 많았다. 조합도 결성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역시 설렁탕은 서울의 음식이다.


▲ 설렁탕은 흔히 조선시대 왕들이 선농단(先農壇)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은 고기를 이용해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먹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설렁탕이 선농단(先農壇)의 행사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내용은 이렇다. 선농단 행사 중 비가 쏟아졌고 행사는 중단됐다. 왕을 보기 위해 많은 백성들이 모인 상태였다. 왕은 소를 잡아 국밥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그리곤 신하와 백성과 함께 ‘국밥’을 먹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실록은 물론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선농단에서 왕이 친경(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모범을 보여 백성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널리 농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행하는 의식)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왕이 외출을 했을 때 비가 오면 속히 환궁하는 것이 원칙이다. 왕이 비 내리는 처마에 앉아서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국밥’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낭만적인 동화이고 성군에 대한 바람일 뿐이다.


설렁탕을 즐긴 대통령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다. 군인 출신이고 늘 시간에 쫓겼다. 그래서 식사시간이 짧았다. 평생 실용적인 국밥 종류를 선호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욕을 얻어먹은 전주의 콩나물국밥집과 헬기로 공수했다던 서울의 곰탕이다. 그 정도로 국밥을 즐겼는데 설렁탕 또한 즐기지 않았을 리 없다. 몇몇 설렁탕집에도 족적을 남겼다. 서울에는 친필을 남긴 집도 있고, 군포의 설렁탕집은 즐겨 찾았다고 한다.





설렁탕의 유래에 관한 또 하나의 ‘설’은 국물 담은 뚝배기에 국물이 설렁설렁하다 해서 설렁탕이라는 이야기다. ‘설’은 ‘썰’이다. 의미 없는 이야기이다. 가장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몽골전래설이다. 고려시대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한반도는 유목민들의 문화를 받아들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안동소주다. 몽골의 유목민들은 육식을 한다. 땅이 사막이니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초지를 찾아다니는 기동성이 중요하다. 계절에 따라 가축과 함께 이동한다. 기록에 따르면 몽골의 전투부대는 늘 식량을 휴대했고, 이 식량은 육포와 같은 건조식품이었다.



그렇게 달리다가 식량이 떨어진다. 식량을 더 구하기도(사실은 약탈하기도) 마땅치 않을 때에는 말이 죽지 않을 만큼만, 말의 피를 빨아 마셨다고 할 정도다. 말이든 양이든 키우는 가축이 죽으면 가죽은 말려서 옷을 만들고, 고기는 먹는다. 남은 고기는 육포를 만든다. 마지막에 남는 뼈는 큰 솥에 넣고 끓이는 ‘슐루’라는 음식이 있다. 이 ‘슐루’라는 말이 변형되어 ‘설렁탕’이 되었다는 게 현재 가장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설렁탕은 오래전부터 있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고기를 만질 수 있던 곳은 궁궐이나 지방 관아 정도였다. 결국 대도시나 관아가 있는 곳들이다. 설렁탕은 대도시이면서 관아가 있고 궁궐이 있었던 서울(한양, 경성)에서 발달한다. 조선 시대 내내 소는 귀했다. 농사를 지을 때 황소 한 마리가 장정 스물, 암소가 열 두 명의 몫을 한다. 조선 시대 성종조의 시인이자 관료 강희맹의 <금양잡록(衿陽雜錄)>은 조선 초기 농사에 대한 기록이다. “동리에 100집이 있는데, 가축이 있는 집은 열 집 남짓이고, 소는 한두 마리에 불과하다. 100집의 밭을 몇 마리 소가 갈자하니 힘이 부치기 마련이다.” 이처럼 농사지을 소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조선은 농경국가다. 소는 가장 크고도 중요한 재산이다. 당장 배가 고프다고 소를 잡아먹으면 내년 농사를 망치게 된다. 한데 소가 모자라는 가장 큰 이유는 소고기의 소비 때문이었다. 세종 7년에는 금살도감(禁殺都監, 고려 후기 우마의 도살방지를 관장하던 임시관서)을 설치해 국가에서 소의 도축을 금지했다. 이는 조선시대 내내 이어진다. 효과는 별로 없었다. 지배층이 소고기를 제일 많이 소비했기 때문이다. 왕실 제사에도 소고기를 금할 정도로 귀했지만, 그나마 정조 무렵에는 물산이 풍부해진다.



▲조선은 농경국가다. 당시 소는 가장 크고도 중요한 재산이었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한다 했다. 서울에만 소고기를 파는 푸줏간이 24개였다고 한다. 정조 17년에는 유례없는 풍년이 들었다. 그러나 호서지방과 호남지방에서 소를 하도 잡아먹어서(사실은 관료들이 약탈하다시피 뺏어가서) 농사지을 소가 부족해서 모내기조차 못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소고기를 납품하는 전문 도축업자들이 있었다. 백정(白丁)들이다. 조선 초기에는 달단족(타타르 족) 등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방인들이 소를 전문적으로 도축했다. 소를 도축한 후, 정육한 고기를 납품하는 일을 마치면 부산물이 남는다. 뼈, 내장, 머리, 피 등이다. 보관은 할 수 없다. 아마도 두루두루 모아서 솥에 넣은 다음 푹 끓여 먹었을 것이다. 설렁탕은 이렇게 면면히 생활 속에 있던 음식이다.


▲ 하영호 신촌설렁탕(좌측)과 이문설렁탕(우측). 이문설렁탕은 마나(소의 지라)가 들어간 서울식 설렁탕을 선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언론인 고(故) 홍승면 씨는 “설렁탕 집 옆을 지나가다가 하얗게 탈골한 소머리를 보고 질겁한 후 오랫동안 설렁탕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에도 설렁탕은 잡뼈든 사골이든 머리뼈든 가리지 않고 넣었다. 설렁탕의 맛을 결정하는 요인은 당연히 소뼈다. 한우뼈냐 수입뼈냐 라는 논쟁이 뜨거웠던 적도 있다. 한우는 한민족이 좋아하는 고유의 맛이 있다고 한다. 물론 한우로 끓인 설렁탕이 제일 맛있지만 한우는 역시 비싸다. 식당 입장에서 이문을 내기가 쉽지 않다. 설렁탕을 잘 끓이려면 뼈를 손질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역시 피빼기가 관건이다. 수입 냉동뼈는 피빼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국산 육우나 젖소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다. 맛이 덜하다. 그래서 섞어 쓰거나 나름의 기술로 피를 빼고 뼈를 곤다.


▲ 공덕동 마포양지설렁탕은 곰탕과 설렁탕의 중간쯤 되는 듯한 맛을 낸다.


도곡동의 ‘하영호 신촌설렁탕’은 수입뼈를 사용한다. 제일 잘 고은 설렁탕이다. 조미료는 일절 쓰지 않는다. 진한 맛보다는 깊은 맛이 난다. ‘이문설렁탕’은 1904년 무렵 문을 열었다. 영업신고제도도 제대로 없었던 시절이니 정확치는 않다. 지금의 주인, 주인 집안이 문을 연 것은 아니지만 가장 오래된 노포로 인정받고 있다. 이문설렁탕은 마나(소의 지라)가 들어간 서울식 설렁탕을 선보인다. 마나의 맛은 쓰다. 현재 유일하게 설렁탕에 마나를 넣는다.


‘마포양지설렁탕’은 곰탕과 설렁탕의 중간쯤 되는 듯한, 재치를 보여준다. 역시 30여 년 넘게 사랑받고 있는 곳으로 함께 내는 파김치가 아주 맛있다. 마포먹자골목에서 공덕동로터리 부근으로 이사 왔다. 설렁탕과 곰탕의 구별법은 간단하다. 설렁탕은 사골 등 뼈를 곤 국물이다. 곰탕은 고기 곤 국물이다. 설렁탕에는 허드레 고기가 들어간다. 곰탕은 정육(精肉)을 사용한다. 설렁탕은 흰색, 유백색이고 곰탕은 노란 기름기가 동동 뜨는 투명한 국물이다.


‘홍익진국설렁탕’은 지명 때문에 혼란스럽다. 홍익동은 청계천과 왕십리 사이에 있다. 나이 드신 할머니가 운영한다. 국물이 상당히 가벼우면서도 깊다. ‘진짜 설렁탕’이라는 평을 듣지만 맛이 전혀 달지 않고 무게감도 별로 없으니 “아무 맛이 없다”는 혹평도 듣는다. 테이블이 서너 개 있고 좁은 봉놋방 같은 공간이 하나 있다. 강릉에도 설렁탕 맛집이 있다. 강릉 ‘가마솥설렁탕’은 국산 뼈를 아주 잘 고아서 내놓는다. 슴슴하고 기름기가 적은 맛이 특징이다.


▶홍익동 진국설렁탕은 가벼우면서도 깊은 국물 맛을 낸다.



본문에 소개된 관광지 & 맛집 정보




  • 맛집 정보

  • 1 하영호 신촌설렁탕: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423-4 / 02-572-5636
  • 2 이문설렁탕: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88 / 02-733-6526
  • 3 마포양지설렁탕: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445-8 / 02-716-8816
  • 4 홍익진국설렁탕: 서울특별시 성동구 홍익동 125 / 02-2292-4700
  • 5 가마솥설렁탕: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산대월리 539 / 033-647-0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