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에 경북 봉화에 있는 ‘청옥산’이라는 곳에 차를 가지고 올랐는데, 순식간에 폭설이 내려 오도가도 못한 적이 있습니다. 갓길에 있는 모래주머니를 날라 타이어 뒤에 받치고, 자동차 진행 방향에 모래를 마구 흩뿌려야 했죠. 처음 경험해보는 불안과 공포를 굉장한 노동으로 메우며 이겨냈습니다. 등에 땀이 줄줄 흐를 때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때의 긴장과 희열은 지금까지도 움찔, 짜릿하게 다가옵니다. 지금 우리는 바이러스로 인해 발이 꽁꽁 묶여 있습니다. 폭설에 그랬듯 모래주머니를 힘껏 날라 헤쳐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현실입니다. 게다가 한 해 중, 12월은 무엇보다 정겨워야 할 때가 아닌가요?
글_김민경(푸드 칼럼니스트)
12월은 얼굴을 마주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함께 밥을 먹고, 따뜻하게 포옹하며 마음을 전하는 때이죠. 멀어진 사이는 가깝게, 무뚝뚝한 사이는 말랑하게, 섭섭한 사이는 웃음 짓게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가득한 달이고요.
하지만, 올 연말은 각자의 집에서 전화 또는 영상 통화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합니다. 혼자 소소하게 즐기는 집콕 홈파티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잠시,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기에 제격인 건 역시 약간의 알코올, 그중에도 와인만 한 것이 없겠죠. 소설 <보물섬>을 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와인은 병에 담긴 시(詩)’라고 했습니다. 불안과 답답함으로 주름진 마음에 한 잔의 시를 선사해볼까요?
요즘에는 다양한 종류와 가격대의 와인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어요. 가깝게는 편의점을 비롯해 대형마트, 백화점, 주류전문점, 와인전문점 등이 있으니까요. 와인을 구입했다면 ‘집콕’하며 맛있게 즐겨야죠. 여러 가지 배달음식도 좋지만, 길고 긴 겨울밤 내내 와인과 나눌 음식이라면 배부르지 않게, 가벼이 먹을 수 있다면 좋겠죠. 만들기에도 먹기에도 번거롭지 않으며, 한입에 쏙, 한 손에 휙 먹을 수 있는 간단한 ‘핑거푸드’를 준비해보세요.
우선 치즈를 떠올려볼까요? 말랑말랑하고 짜지 않은 브리, 카망베르 같은 치즈, 쫀득하고 고소한 에담, 고다, 체다 같은 종류, 단단하고 짭짤한 파르미자노 레지아노, 그라나파다노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어요. 누구나 좋아하고 익숙한 슬라이스 치즈도 좋아요.
맛이 단조로운 크래커 위에 말랑한 종류의 치즈나 슬라이스 치즈를 올려 카나페를 만들어요. 크래커 대신 얇게 썬 바게트나 호밀빵, 곡물빵도 좋아요. 이때 빵을 살짝 구워 수분감을 덜어내면 치즈를 올리기에 더욱 좋아요. 치즈 위에는 잘게 썬 마른 과일(살구, 건포도, 무화과, 크랜베리 등)이나 아몬드 슬라이스, 또는 굵게 다진 피스타치오나 캐슈너트처럼 씹는 맛이 좋은 재료를 올려 완성해요. 보기에도 예쁘죠.
쫀득한 치즈는 꼬치에 꽂아보세요. 치즈는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자르세요. 씨를 뺀 작은 올리브(블랙, 그린 모두 좋아요), 단감이나 사과, 배처럼 달고 아삭한 과일 한 쪽, 출출한 때라면 작은 소시지를 삶거나, 햄을 살짝 구워 함께 꽂아 냅니다. 쏙쏙 빼먹는 재미도 있고, 여러 가지 맛의 조화가 좋은 안주에요.
짭짤하고 단단한 치즈는 뭉툭하고 큼직하게 여러 조각으로 썰어 그대로 접시에 올려도 좋아요. 한 조각씩 들고 사탕처럼 갉아 먹고, 쪼개 먹는 맛이 재미있죠. 혹시 푸른곰팡이가 핀 콤콤한 블루치즈를 즐긴다면, 고르곤졸라, 블루 도베르뉴, 로크포르 등을 준비하세요. 작은 접시에 덩어리째 놓고, 꿀을 끼얹거나 곶감을 조금씩 잘라 함께 먹으면 꿀맛이에요.
고기가 빠질 수 없죠. 온라인 마켓에서 다양한 훈연 햄과 소시지, 육포 등을 쉽게 구할 수 있어요. 지방과 고기, 향신료가 들어간 초리소나 살라미는 얇게 잘라 그대로 집어 먹어도 맛있어요. 짜고 기름진 맛이 부담된다면 배나 멜론, 파프리카나 토마토를 한입 크기로 썰어 같이 먹는 것도 좋습니다. 잠봉이나 모르타델라 같은 훈연 햄은 부드럽고 면적이 넓은 장점을 이용하여 팽이버섯, 파프리카, 아스파라거스, 꽈리고추 같은 채소를 돌돌 말아 기름에 살짝 구워 소금 간을 조금만 하세요. 훈연 햄 대신 베이컨으로 만들어도 됩니다.
와인은 서양의 술이지만 한국의 여러 재료와도 잘 어울립니다. 향이 강하고 기름진 서양의 햄 종류를 즐기지 않는다면, 수육이나 편육은 어떠세요? 접시 위에 가지런히 펼쳐 놓고, 고기 위에 마늘 편, 송송 썬 오이고추 한쪽, 된장을 조금 올리는 등 담음새를 바꾸면 보쌈 고기도 핑거푸드가 된답니다.
한 가지 더! 이맘때의 배추는 정말 맛이 좋아져요. 알배추 가운데의 작고 노란 잎을 가지런히 펼쳐 놓고, 와사비 마요네즈나 짠맛이 세지 않은 쌈장을 조금씩 얹어 두세요. 한 잎씩 집어 들고 아삭아삭 베어 먹는 맛이 시원하고 개운해요. 조금 더 공을 들여보면 서양식 멸치 절임인 안초비를 얹어도 좋고, 통조림 참치의 기름기를 빼고 마요네즈로 버무려 배춧잎과 곁들여도 맛있죠. 배춧잎 대신 아삭한 양상추 잎으로 대신해도 됩니다.
후식주나 달콤한 와인에는 단맛 나는 안주도 필요하죠. 이럴 때는 플레인 크림치즈에 과일 잼이나 꿀을 섞어 질감은 부드럽게, 단맛은 좋아지게 만들어보세요. 이렇게 만든 치즈를 바삭한 과자에 조금씩 발라 먹거나, 반으로 자른 딸기에 조금씩 얹어도 좋아요. 홍시도 아주 좋은 안주가 됩니다. 미리 여러 개의 홍시 속만 발라 큰 그릇에 담아 냉장실에 차게 두면 안주도 되고, 입가심을 하기에도 아주 좋아요.
12월은 한 해 동안 감사했던 마음을 나누며 정겨워야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만남도 쉽지 않습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함이니 아쉬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근사한 와인과 핑거푸드를 홈파티로 즐기며 연말 분위기를 흠뻑 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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