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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핵공감, 사이다 콘텐츠의 비밀

“이거 완전 내 이야긴데?”
‘내 속에 쏙 들어왔다 나간 듯’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날려주는 사이다 콘텐츠. 최근 들어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사이다 콘텐츠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웹툰은 물론이고 드라마, 영화 같은 대중문화 전반에서 각광받고 있는 이들 콘텐츠의 비밀은 무엇일까?



“인턴! 넌 뭐가 그렇게 신나서 실실거려?” 직장 상사가 이제 갓 들어온 인턴에게 지청구를 날린다. 그런데 이 인턴, 보통내기가 아니다.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듯 부장이 한 말을 또박 또박 받아 되돌려준다. “부장님은 뭐가 그렇게 화나서 씩씩거리세요?” 월급은 언제 줄 거냐고 부장에게 묻자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돈 타령”이란다. 그러자 이 인턴의 사이다 반박이 이어진다. “부장님은 돈도 제대로 안 주면서 왜 일 타령이세요?” 관객의 박수갈채가 터진다.



KBS <개그 콘서트>의 코너 ‘불상사’의 한 대목이다. 여기 등장하는 인턴(개그우먼 박소영)은 사이다 캐릭터로 불린다.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겪거나 느꼈을 상황들이지만 현실에서는 말 한마디 할 수 없던 걸 이 인턴이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턴은 “야, 열정페이란 말 몰라?”라는 부장의 말에 “페이를 주셔야 열정이 생기죠”라고 재치 있게 받아넘긴다.



 사이다와 고구마

 

 사이다: 사이다를 먹은 듯 속 시원하다는 의미

 고구마: 고구마를 먹은 듯 속이 답답하다는 뜻




최근 들어 직장인들의 애환을 속 시원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사이다 콘텐츠’가 인기를 얻고 있다. 일명 ‘약치기 작가’로 불리는 양경수 작가의 <일하기 싫어증>이라는 한 컷짜리 웹툰도 그중 하나다. “보고서가 개판이네”라는 상사의 말에 부하 직원은 ‘개처럼 일만 시키니까요’라고 혼잣말한다. 이 장면에 어느 직장인이 빵 터지지 않을 수 있을까.


‘약치기 작가’라는 별명은 독자들이 양 작가에게 붙여준 예명이다. 그가 그리는 공감 백배 웹툰이 ‘힐링’과 ‘처방적 성격’을 띄는 덕분이다. 그의 웹툰에는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린 야근과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상사의 지시, 답답해도 어쩔 수 없이 참아내야 하는 감정노동의 연속 등이 담겨 있다. 독자들은 그의 웹툰을 보면 일종의 약을 처방받는 느낌을 받는다.


▲ 그림왕 양치기의 '약치기 그림'을 상품 디자인으로 활용한 세븐일레븐의 ‘약치기빵’


월급 로그아웃, 직장 살이, 메신저 감옥 같은 신조어들은 오늘날 직장인들이 처한 현실을 말해준다. “월급이 로그아웃하셨습니다”라는 말을 줄인 ‘월급 로그아웃’은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카드값, 세금, 식비 등으로 다 빠져나가는 직장인들의 주머니 사정을 말해준다. ‘직장살이’는 ‘시집살이’에 맞먹는 힘겨운 직장에서의 삶을 드러낸다. ‘메신저 감옥’은 쉬는 시간에도, 퇴근을 해도, 수시로 날아오는 메시지들로 쉴 수 없는 직장인들의 비애를 담고 있다. 현실이 이러하니 많은 직장인들이 약치기 작가의 웹툰에 푹 빠질 수밖에.



또 하나의 사이다 콘텐츠가 KBS 수목드라마 <김과장>이다. 이 드라마의 성공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작비 200억원, 이영애와 송승헌이라는 초특급 스타가 등장하는 <사임당, 빛의 일기>에 비해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웬걸? <김과장>은 이영애의 복귀작 <사임당, 빛의 일기>를 제치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 직장인들의 애환을 담은 KBS 2TV <김과장> 공식 포스터


<김과장>은 전형적인 소시민 영웅의 이야기다. 의인은커녕 대기업 경리부에 삥땅을 해 먹기 위해 들어온 김 과장(남궁민)이 어쩌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구해주면서 의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직장인을 비롯한 서민의 막힌 속을 뚫어줬다는 점이 <김과장> 신드롬에 크게 작용했다. 서민과 일체감이 높은 캐릭터가 재벌 오너 가문, 검사 출신 임원 등을 쩔쩔매게 하는 모습이 통쾌감을 안겨준다. 일종의 서민 히어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이다 콘텐츠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고구마 같은 현실 때문이다. <개그 콘서트> ‘불상사’의 인턴이 “퇴근하면 깨톡으로 일시키지 마세요”라는 대사나 ‘메신저 감옥’이라는 신조들은 디지털 환경이 만들어낸 업무의 연장을 꼬집는다. ‘스마트 워크’가 되면서 많은 직장인들은 일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퇴근 후에도 일을 하게 되는 ‘부자유’를 얻게 된 것과도 같다.




사이다 콘텐츠에 열광하는 건 2030세대만이 아니다. 팍팍한 현실에 치이고 일상에 지친 4050세대에게까지 공감을 얻고 있다. 이처럼 사이다 콘텐츠는 현 상황의 문제점을 많은 이들에게 인식하게 하고, 해당 문제점을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사이다 콘텐츠가 현실에서 벌어질 확률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이들 콘텐츠가 선사하는 일탈과 해방감은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더욱 시원하게 날려준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이다식 표현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등 양자가 소통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사이다 콘텐츠만 많은 현실보다는 진짜 사이다 같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